[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마흔의 여자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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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마흔의 여자 9-9
  • 김선옥
  • 승인 2022.12.17 08:58
  • 기사수정 2022-12-17 0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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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그림/Joana(작가의 딸)
표지그림/Joana(작가의 딸)

(…#9-8에 이어) 미순이는 죽었다. 불행한 여자들을 돕는데 써 달라는 유언과 함께 내가 일하는 상담소에 많지 않은 재산을 모두 기탁하고 떠났다.

사람이 얼마나 아름답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는지 나는 미순이를 통해 배웠다.홀가분한 표정으로 떠나던 미순이, 진심이 담긴 그녀의 말과 표정을 나는 도장을 찍듯 오래오래 가슴에 새겼다.

미순이를 화장하던 그날, 나는 화장터에서 첫사랑인 주호를 만났다.

귀공자의 빛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뭘 하고 살았는지 차림이 형편없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는 나이에 비해 겉늙어 보였으며 귀밑머리칼은 회색이 완연했다.

눈치를 살피며 비굴한 태도로 연신 말을 붙이려는 그에게 나는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다가올 낌새가 보이면 재빨리 피했다. 미순이의 떠남으로 그와의 삼각형태는 말끔히 사라졌으므로 끊어진 구도에서 다시 그와 이어질 이유는 없었다. 날름거리는 불의 혀가 시신을 삼키는 동안 나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끝날 때까지 모르는 사람처럼 멀리 피하다가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지금도 나는 혼자다. 미순이처럼 몸매를 빵빵하게 가꾸지 못했고, 여자 냄새를 풍기지 못한 잘못도 있다. 일의 성격상 남자를 구경할 기회가 적고, 결혼이라는 단어에 화들짝 놀라는 버릇마저 있다.

하긴 주호를 천당으로 보냈다던 미순이도 주호가 떠나고 다시 남자를 만나지 않았던 사실은 묘하다. 내게 보너스까지 챙겨 준 그가 뭐라고 변명할지 기대되는 부분이다. 어쨌거나 나는 혼자인 내 삶이 축복이라고 여긴다.

죽기 전에 품었던 미순이의 생각은 알 수 없다. 주호에 대한 감정 없이 그냥 죽었거나 잠깐 과거를 추억했을 수도 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을 떠올린다니까 미순이도 잠깐 그랬을지 모른다. 생전에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입버릇처럼 욕설을 퍼부었으니 주호를 죽이고 싶었을 수도 있다. 살을 섞고, 아이까지 낳은 부부였으니 극단으로 치달은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고, 죽지 않은 내가 짐작할 수 없는 부분이다.

육체적인 숨을 끊는 것만 살인이 아니다. 정신적인 살해도 삶의 무게에서 시시비비의 논란엔 가차 없다. 사랑이란 착각에서 헤매던 순간에는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울타리가 내겐 당연한 삶이었으나 사랑이 끝났을 때 그렇지 않았다.

가정이란 형식이 합법을 가장한 교미와 다르지 않다는 인식이 들었다. 충격적인 황당한 이별이 인식을 바꾼 계기였다. 그로인해 나는 영악스럽지 못한 자의식을 깨웠다. 혐오스런 부류의 수컷을 다시 만나지 말란 법이 없으니 그의 덕택으로 기대를 접은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나는 암내를 풍기기에 적절치 못한 인간이고, 성격상 수컷의 비위를 맞추는 일도 비위에 거슬린다. 가족이란 집단에 소속되기에도 부적합한 종족이다.

여성문제연구소의 상담직종에 근무하는 나는 하루에도 수많은 여자들을 만난다. 그녀들은 책상 앞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죽지 못해 사는 생을 고발한다. 남자를 잘못 만나 비참한 삶에 붙잡혀 질질 끌려 다니던 미순이와 닮은꼴 인생이다.

막판에 상담소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대부분 연약하다. 그녀들의 구질구질한 삶을 들여다볼수록 분노가 치솟는다. 주호처럼 말없이 떠나는 남편이라면 남은 인생이라도 행복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나를 찾아오는 여자들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터에 버려져 있다. 방치된 그녀들은 너절한 상처를 꺼내어 내게 펼쳐 보이고, 가슴 아픈 목소리는 미순이의 삶을 그대로 증명한다.

어두운 표정으로 기로를 헤매는 그녀들의 안내자 노릇에 익숙해진 나도 미순이가 생각나면 가끔씩 곰팡이가 하얗게 피어나는 느낌으로 식은땀이 흐른다. 고달픈 여자들과 만나면 내 선택에 박수를 친다. 자칫 고달게 살았을 생이 아찔해서다.

오래도록 거실에 앉아 있다. 베란다 창문을 넘어오는 어둠을 미동 없이 소파에서 맞는다. 침입자를 내쫓지 않으려고 전원을 켜지 않았다. 종일 굶었더니 속이 쓰리다. 위에 음식물을 채우지 않으면 배를 움켜잡고 신음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젠 점령군처럼 들어오는 통증으로 자리에서 일어서야 한다. 스위치를 켠다. 혼자서 겪는 아픔은 심각하고, 참는 일은 쉽지 않다. 혼자 먹기 위해 반찬을 만드는 절차도 번거롭다.

전기밥솥에는 아침에 해 놓은 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역국을 끓였지만 미순이는 그마저 먹지 못한다. 쟁반에 밥과 식은 미역국을 챙긴다. 살아 있었다면 미순이는 마흔의 첫날을 어떻게 보냈을까. 아마 이렇게 초라하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케이크 앞에서 나이만큼 촛불을 밝히고, 축하의 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미순이와 함께하던 과거와 달리 나는 혼자서 그녀의 생일을 맞는다.

거실의 탁자에 쟁반을 놓고 입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는다. 텔레비전을 켜자 음악프로가 뜬다. 낯익은 가수가 나와서 노래를 부른다. 목소리가 애잔하다. 구슬픈 음률을 듣고 있으니 미순이의 아버지가 생각난다. 가슴을 후비게 만드는 술이 취해 부르던 그의 노랫가락이 그립다. 미순이도 아버지를 닮아 목소리가 좋았고, 그녀의 노래를 듣다 보면 저절로 눈물이 났다. 과거의 무대 뒤로 사라진 노래들은 생일을 축하하던 지난 시간과 함께 사라졌다. 태어나는 것들, 생명이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오묘하고 신비하다. 생명체는 아름답지만 생명의 불꽃이 꺼진 사물들을 떠올리면 잿빛의 막막한 어두움뿐이다. 사라져서 저 너머 알 수 없는 세계에 갇힌 존재는 가슴을 더욱 아릿하게 만든다. 내게는 미순이가 그렇다.

하루가 지나치게 길고, 지루하다. 생각할 것들도 접고, 조용히 잠들었으면 좋겠다. 오늘과 기쁘게 작별하기 위해 나는 천천히 잠자리에 눕는다. 눈을 감으면 기차 바퀴의 울림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감미로운 소리와 함께 꿈속에서 미순이를 만나고 싶다.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 버리고 오늘 밤 그녀는 내게로 올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감고 잠이 오기를 기다린다. <끝>

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은 매주 토요일에 이어집니다. 

 

김선옥 작가는?

김선옥 작가
김선옥 작가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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