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마흔의 여자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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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 #마흔의 여자 9-6
  • 김선옥
  • 승인 2022.11.26 08:45
  • 기사수정 2022-11-26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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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에 이어)주호와 이별한 것은 대학에 입학하고 두 번째 해였다. 나는 그와 그렇게 치졸하게 헤어졌다. 내 지독한 이별은 사랑의 감정이 쓰레기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 후였을 것이다. 그를 생각하면 서슴없이 쏟아 내던 언어들이 그의 얼굴보다 먼저 떠올랐던 것은.

덕분에 그와 쌓았던 사랑에 별다른 미련도 없었다.

주호와 한편에 서서 내 지나간 사랑을 모독했던 미순이는 어땠을까.

그녀는 주호에 대해 군침을 삼키던 마음을 내게 감추었다. 나름의 속셈이 있었지만 속내를 들킬 정도로 어수룩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일찍 사회에 뛰어들어 세상살이에 노력했던 그녀가 주호를 욕심낸 것은 당연했다. 내놓은 자식이고, 비록 환대받지는 않았어도 외아들인 주호를 움켜잡는 일은 미순이게게 행운이었을 것이다.

건달로 지내면서 평판이 나빠졌으나 입장이 비슷한 미순이 또한 아쉬울 이유도 없었다. 주호의 집안이 짱짱해서 신분 상승의 티켓이 되는 실리적인 면도 있었다. 남자를 요리하는데 도가 튼 상황에서 이익을 위한 유혹은 쉽고 간단했을 것이다.철저하게 계산하여 면밀하게 진행시킨 각본이라는 심증은 있어도 증명할 수는 없다.

“새로운 여자가 생겼대. 주호가 떠났어."

주호가 떠난 사실을 알렸을 때 미순이는 말이 없었다. 그녀를 핑계했다는 사실을 내가 아는지 궁금했을 텐데도 침묵했다. 나도 구태여 그녀의 이름을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도 내겐 주호처럼 오랜 친구였다.음산하게 도사린 미순의 상처가 내게 옮겨 왔다. 피해와 불신의 감정이주홍글씨처럼 가슴에 새겨졌지만 친구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내가 주호와 헤어진 후에 미순이는 아이를 가졌다.아이의 아버지는 당연히 주호였다. 극심하게 반대했던 주호의 집에서도 미순이를 결국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순이는 다방을 그만두고, 시집에 들어가 생활했다.

주호는 결혼하고도 여전히 건달이었다. 사업한다고 떠들썩하게 사무실을 낸 적이 여러 번이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재산을 물려받기도 전에 팔아서 야금야금 없앴다. 못된 짓만 골라 하는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지친 그의 모친은 화병으로 먼저 세상을 떴다. 아버지는 새 부인을 얻었고, 계모는 미순이보다 서너 살 위였다. 노련한 미순에게도 만만치 않은 여자였다. 그녀는 늙은 남편에게 아들을 안겨 줄 정도로 요령이 좋았고, 늦동이에 정신을 빼앗긴 늙은 남편은 아내가 하는 말이라면 팥으로도 메주를 쑤었다. 계모는 집으로 비집고 들어온 즉시 도시에 전셋집을 얻어 주호를 내몰았다. 말이 분가지 내쫓은 거나 다를 바 없었다.주호가 손을 내밀면 집안에 발도 들이지 못했다.

끈 떨어진 뒤웅박인 주호의 처지에 녹록치 않은 미순이의 계산이 빗나갔다. 미순이는 무능한 남편을 대신하여 돈벌이에 나서야 했다. 나이 들어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로 전락한 미순이 어머니는 어린 자식을 맡아야 했다. 욕쟁이 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미순이는 생계를 위해 다방에 일자리를 얻었다. 고달픈 삶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주호는 미순이라는 숙주에 기생하여 생존했다. 사지가 멀쩡한데도 빈둥거리며 미순이가 발이 붓도록 배달하여 벌어온 돈을 가져갔다.

돈이 생기면 그는 집에서 탈출했다. 그럴 때마다 이곳저곳에서 빚을 얻었고,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훌쩍 사라진 그의 자리엔 흐트러진 파편처럼 빛들이 널렸다. 그는 떠나면 오랫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돌아올 때는 가져간 돈이 몽땅 떨어진 후였고, 그의 모습이 나타나면 애써 저축한 미순의 피전이 깡그리 날아갔다. 빈털터리 신세가 되면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온 그는 돈이 되는 것들을 모조리 훑어서 다시 사라졌다. 진저리치는 생활의 번복이었다. 뒷감당하느라고 미순이는 고단한 허리를 반듯하게 펼 겨를이 없었다.

힘든 와중에 다섯 살인 아이가 몹쓸 백혈병에 걸렸다. 아이의 목숨은 미순이의 손에 달려 있었다. 죽을 힘쓰며 숨 가쁘게 번 돈을 미순이는 쓰지 않고, 아껴서 근근이 저축했다. 몇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온 주호는 집안을 온통 뒤져서 아이를 위해 마련한 돈을 들고 뛰었다. 돈만 훔쳐서 달아난 게 아니라 예전처럼 주변에 빚까지 남겨 놓고 떠났다. 감쪽같이 사라진 그는 전화 통화에서 짤막한 이별의 말을 지껄였다.

"헤어지자 다시는 집에 가지 않을 거야."

간단한 한마디가 미순이와 그의 마지막이었다. 나를 떠날 때 다른 여자에게 사랑 비슷한 감정이 생겼다고 변명했으나 아내인 미순이를 떠날 때는 아무 이유도 대지 않았다. 헌신짝 버리듯 가볍게 버렸다. (계속)

김선옥 작가의 단편소설은 매주 토요일에 이어집니다. 

김선옥 작가는?

김선옥 작가
김선옥 작가

ㆍ군산 출생

ㆍ개정간호대학(현 군산간호대학교) 졸업

ㆍ1981/1987/1991년 간호문학상(단편소설)

ㆍ1991년 청구문학상(단편소설)

ㆍ2000년 전주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ㆍ2018년 채만식 문학상 운영위원

ㆍ現 한국소설가협회-전북소설가협회-전북문인협회-소설문학 회원

ㆍ現 논산 행복한 요양병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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